
1. 심리학의 시작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정신 과정, 영혼에 대한 학문’이라고 정의된다. 이는 기원전부터 쭉 있던 생각이지만 단지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현대 심리학 정립 이전에는 심리학의 경계가 모호하여 철학자들의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인식론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고 그 논쟁은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이 이어받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데카르트는 심-신 문제에 있어 이원론을 주장해 마음과 몸이 별개임을 주장해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요시하는 현대의 심리학과는 조금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은 1590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해서 진행한 심리 실험을 다룬다. 이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마르코 마루릭이 조건을 사용해서 진행한 작업목록이 있지만 내용이 소실되었다. 1010년 출간된 파티마 칼리 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의 저서인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으로 심리학적 시각을 설명했다. 영국의 의사 윌리스는 정신의학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를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 명으로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에 따라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심리학은 철학에서 분리되어 과학의 한 분야가 되었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분트는 1879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첫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 실험실을 개설했고 그는 심리학 연구의 방법론으로 ‘내성법’을 주장했다. 미국의 제임스라는 철학자는 1890년 ‘심리학의 원리’를 출간했다. 그는 당시 심리학의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춰 책을 저술했다. 에빙하우스는 ‘기억’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베를린 대학에서 수행했고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해 ‘학습’의 과정을 연구한 기록이 있다.
2. 정신분석 심리학
1890년대,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장해 독립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무의식과 자아,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을 사용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며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와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를 인간 행동의 기반이라고 보았다. ‘리비도’는 2차 대전 전의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 이후의 프로이트가 만든 개념이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의 발견, 심적 결정론은 심리학에 기여한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후 그에게 영향을 받은 정신 분석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곧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과학철학자인 포퍼에 의해 유사 과학으로 지적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크게 위협받았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포퍼의 주장한 경험적 증거와 반증 가능성이 과학에서 주요한 속성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지적은 대부분 수그러들었다. 정신분석학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과 문제점 등으로 인해 영향력이 축소되어 정신분석이 현대 심리학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은 정신분석학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서 정신분석학의 명맥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고,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닌 문학비평 등의 다른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3. 형태주의 심리학
형태주의 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독일의 심리학자인 베르트하이머가 일상적인 지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자신의 논문인 ‘운동지각에 관한 실험연구’에서 제시한 시기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 세 사람은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인 에렌펠스와 칼 슈툼프다. 마흐가 주장한 것은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작은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렌펠스가 주장한 것은 ‘형태질’의 존재로,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인 감각 요소 이상이라는 것이다. 슈툼프는 분트와의 논쟁하는 과정에서 일반인보다 숙달된 청자가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의 영향 아래,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이 성장했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에 주목했으며, 실제로 없던 것이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 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베르트하이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정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가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르트하이머의 피실험자였던 코프카와 콜러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고 둘 다 슈툼프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코프카는 미국에 게슈탈트 심리학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콜러는 그 이후에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집중했다. 이들이 관심을 기울여 연구한 분야는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가’이고, 이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라고 이름을 붙여 발표했다.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던 레빈은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한다. 그의 장이론은 생활 공간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환경과 사람 모두 행동에 영향을 준다. 레빈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레빈은 자신의 개념들을 위상기하학을 차용해 시각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개별 사례 연구 등의 많은 업적을 남겼다.
4. 인본 및 인지주의 심리학
인본주의 심리학은 1950년대 샤르트르 등의 철학자들이 실존주의를 주장한 것의 영향으로 파급되었다. 인간중심 심리치료를 주장한 로저스, 욕구 이론을 주장한 매슬로 등이 주요 심리학자이다. 인지심리학에 대한 정의는 ‘감각 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으로 인해 시작되었으나 20세기 후반 일어난 ‘인지 혁명’이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당대를 지배하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인간을 보았는데, 이에 따라 크게 비판받게 되었다. 측정, 관찰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내적, 심적 과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언어학자들과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으로 ‘인지 혁명’이 시작되었다. 언어학자인 촘스키는 인간의 내적 심리 과정이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동주의 심리학을 비판했다. 이렇게 인지주의 심리학은 시작되었다. 인지주의 심리학은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이다. 인간의 심리 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이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인데, 이는 인접 학문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